논어 제2편 위정爲政(책리뷰)
이 글은 홍익출판사의 《논어, 김형찬 옮김》을 인용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위정(爲政) 편은 정치론이 비교적 많아서 당시 시대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 못하고 원문만 봐서는 현대의 시각으로 봤을 때 고루해 보인다는 오해를 사기 쉬운 편이다. 하지만, 공자에게 있어서 정치라는 것은 바로 덕德의 실현이고, 예禮의 정립이고, 그리고 인간됨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런 시각에서 당시 상황을 고려해 구절들을 바라본다면 당시 시대상에서 대표되는 주제들을 다루어 보편적인 도리에 대해 설명해 내고자 하는 공자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지 않을까.
4장 子曰 吾 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삼십에 뜻을 세우고, 사십에 미혹됨이 없게 하였고, 오십에 하늘의 뜻을 헤아리게 되었고, 육십에는 무엇을 듣든 순조롭게 이해했고, 일흔에는 마음이 가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라는 유명한 구절이다.
나이가 몇 살이고 경험이 얼마나 많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처음 살아보는 오늘을 살아가는 존재여서,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인가 늘 의문에 빠지기 마련인데 (물론, 그저 맹목적으로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그럴 때마다 어떤 이정표로서 되뇌어 보기에 알맞은 구절이 이 4장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나이에 따른 성향이나 역할도 많이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보편적 원리를 담고 있는 구절들이 아닌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갔으면 하는 부분은 보통 삼십(三十)이 이립(而立) 즉, “뜻을 세운다.”라는 의미로 보통 해석되지만, 어떤 학자들은 거기에서 조금 더 깊이를 더해 “자기 자신을 세운다.” 즉, “많은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알아가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신을 세워나가는 ‘기간’으로서의 ‘而立’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삼십 대가 되어서도 수년간 많은 시행착오와 시련을 겪어왔던 공자의 생애를 돌아보더라도 딱 삼십 대에 이러했다는 의미보다는 그 기간 동안 자신을 세워 나 갈 수 있는 과정을 겪었다고 보는 편이 더 어울리고, 나 자신에게도 그게 더 합리적이라, 나는 후자의 해석이 더 마음에 든다.
10장 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바라보다’라는 시(視), ‘살펴보는’ 관{觀}, ‘관찰’해 보는(察)의 과정으로 상대의 본성을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과 다르게 행동할 절제력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고(철학에서 이것을 보통 이성이라고 부른다.), 모든 행동에는 동기가 따른다. 따라서 행동과 그 결과만 단순하게 봐서는 그 사람의 진의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래서 앞뒤를 살펴 동기를 따져봐야 하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사소한 행동을 관찰하여 본성을 읽어봐야 한다. 사람은 결코 그 본성을 숨기기가 어렵다. 본래 그렇다. 그래서 음주 면접과 같은 것도 생기지 않았겠는가.
여기서 한 가지, 내가 남을 관찰할 수 있듯이 남도 나를 관찰할 수 있다는 것, 열심히 이미지메이킹을 해놓고도 사소한 행동 하나 둘에 자신의 본 모습이 비쳐 나올 수 있다는 것, 경계하며 살아가야 할 부분이다.
11장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우리가 잘 아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사자성어가 여기서 나온다. 기본적으로 옛 것을 미루어 새것을 알아야 한다. 즉, “나날이 배운 것을 잊지 않도록 익혀가고, 나날이 새로운 지식을 알아가라.”라는 뜻인데, 다의적 해석으로 “실천(온고溫故)을 통해, 경험(新)을 쌓는다(知).”라고 은유적으로 해석해 봐도 재미있다.
여기서 쑨원孫文의 『쑨원학설』의 제2장에 나오는 구절을 같이 음미해 보자.
役古而不爲役古, 如能用古人而不爲古人所惑, 能役古人而不爲古人所奴,
則載籍皆似爲我調查, 而使古人爲我書記, 多多益善矣。
만약 옛사람(의 저서)을 활용하되 그에 미혹되지 않고, 옛사람(의 지혜)을 부리되 그에 부림 당하지 않는다면, 다양한 책의 내용은 마치 나의 개인 서기라도 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니, 책이 많을수록 더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울림이 있지 않는가?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적 성인적 인물들의 저서들을 탐독하여 익히되 그 문자에만 현혹되지 않고, 그 지혜를 시대와 나의 상황에 알맞게 적용해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이 그저 독서일 뿐이겠는가. 그것은 마치 여러 명의 훌륭한 멘토들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그런 삶이 아니겠는가.
12장 子曰 君子 不器。
이런 게 논어의 어려운 점이다. 이것을 “군자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응? 무슨 헛소리지?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자세히 한번 음미해 보자.
그릇이란 무엇인가, 물론 창의적으로 그릇을 머리에 쓸 수도 있고 거기에다가 식물을 키워 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그릇이란 어떤 프레임에 갇힌 국한된 그런 존재의 은유이다. 즉, 하나의 용도에 국한되지 않고 어떤 용도에든 두루 쓰일 수 있는 자질의 소유자가 바로 군자라는 의미이다. 바로 “군자는 그릇처럼 한 가지 기능에만 한정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물론 사람이 어떻게 만능으로 살아? 선택과 집중 모르나? 답답한 양반아!”라고도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조금만 유연하게 받아들여보자, 공자 자신도 학문뿐만 아니라 군사학, 정치학, 시, 음악 등등 다방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개발하며 살아온 사람이고, 죽는 날에도 『역경(주역)』을 붙잡고 사경을 헤매었던 사람이다. 그 희대의 성인도 끊임없이 자신을 개발해오며 살아온 사람이다. 이런 자세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특히 요즘같이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는 더욱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AI니 블록체인이니 암호화폐니 IoT니 어느 날 갑자기 생소한 것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고 우리의 생활에 깊숙이 스며온다. 맹목적으로 과거의 성취에 취해 ‘바람이 부는구나’ 하며 살 듯 살아도 썩 나쁠 건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경쟁력을 갖추고자 하는 ‘군자’라면 ‘프레임, 그릇’에 국한되어 살아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13장 子貢 問君子 子曰 先行其言 而後從之。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다. “군자는 말보다 앞서 행동을 하고, 그에 따라 말을 한다.”
말보다 주먹이 앞선다. 뭐 이런 의미가 아니고 가벼운 말로써 내보이지 말고 행동으로 내보이라는 말이다. 말의 무거움 중요성, 공자는 이렇게 『논어』 전반에 걸쳐 번지르르하고 믿음이 없는 말과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을 경계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말은 곧 신용이다. 조심해서 절대로 나쁠 게 없고 아낄수록 귀해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감사와 사과만큼은 절대 아껴서도 안되고 늦어서도 안되지만)
15장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막연하여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아니면 요즘 상황에 비추어 “지식(學)이 있으나 뜻(思)이 없으면 막연하여 얻는 것이 없고, 뜻은 있으나 지식이 없으면 위태롭다.”라고 해석해봐도 좋을듯하다.
17장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소크라테스 : “무지의 지, 즉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고 발전의 원동력이다.”
@노자 : “知不知 上,不知知病。내 말이 그 말이야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고,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건 병이야 병.”
이 시대에 무슨 카톡이 있어서 서로 교류를 할 수 있었겠는가. 이 시대 이후에 나온 철학자들의 비슷한 말이야 어느 정도 선대의 영향에 의해 그랬겠다 할 수도 있겠지만, 거의 동시대를 살다 간 이 철학자들이.. 이 정도 되는 사람들이 입 모아 말할 정도면, 정말 모르는 걸 안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이라는 게 설명되는 것 아니겠는가. (행동경제학, 심리학 등에서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듯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정신의 자기방어적 기제로 인해 많은 사실들을 왜곡하여 인식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심지어 이것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자, 조금 찔리니까.. 한번 더 밝히고 가겠다.
“이 글은 내가 잘 안다고 쓰는 글이 아니고, 개인적인 기록의 성격임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뒤에 몇 장 더 소개해 볼까 하다가… 너무 길어지니 여기까지 하고 마무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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