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갖은 악조건과 위험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안전한 집이 있고, 여유 있는 자원에 먹고사는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최소한의 정해진 의무만 다하면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쉴 수 있고 즐길 수 있다.
최적의 관리와 치료를 받을 수 있어 신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도 경험할 일이 없고, 심지어는 노화에 대한 솔루션까지 완벽히 준비되어 있어 두렵고 성가신 노화의 경험 없이 깔끔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가장 진보한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는 세상에서 질서 있고 안정된 삶을 누리다가 안락하게 삶을 마감한다.
가히 유토피아적인 세상에 대한 묘사로 들린다. 불안과 고통과 갈등이 없는 완벽한 환경, 개개인의 인생의 구체적인 목표는 가지각색이겠지만, 그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이유에는 분명히 언젠가는 이런 안정된 환경 속에서 머물고 싶다는 욕망이 일각 자리 잡고 있으리라.
‘불안’이 없는 ‘안정’의 세상’. 보카노프스키 시스템에 의해 구축되고 ‘최적’의 기술들과 제도들에 의해 ‘아름답게’ 통제되는 세상, 이 소설 ‘멋진 신세계’의 배경이 되는 세상은 바로 그러한 욕망을 완벽에 가깝게 충족시켜 주는 그런 곳으로 그려져 있다. 그야말로 멋진 유토피아, 멋진 신세계이다.
(왜 최신 기술이 아니고 ‘최적’의 기술인가, 왜 통제를 ‘아름답다’라고 표현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며 읽어보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왜 이 소설 속 ‘멋진 신세계’의 이미지를 보면서 ‘안정’이나 ‘행복’이 가득한 유토피아보다, 양계장의 닭이나 축사의 돼지가 먼저 떠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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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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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쓰여진 올더스 헉슬리의 SF소설 <멋진 신세계>
그의 놀라운 창의력에 의해 탄생한 소설 속 세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이야기의 주된 배경이 되는 ‘포드의 신세계’는 우리가 잘 아는 포드(Ford) 자동차의 대량 생산 시스템을 기반으로 형성된 사회다.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효율성과 안정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이에 부응해 ‘공유, 균등, 안정’이라는 기치를 최고 가치로 정한 이 신세계는 거듭된 공격적 개혁을 통해 최적의 기술과 제도를 구축하여 비효율과 불안정을 제거하고, 공동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회로 변모하였다.
“만인은 만인을 위해 존재한다 “
다른 한부분의 세상은 ‘야만’의 세상이다. 그곳의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고집하는 집단으로 ‘신세계’의 기술이나 자본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도태되어 낙후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고통이나 불안과 같은 것들이 제거된 신세계와는 다르게 인간으로서 가지는 번뇌를 그대로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여기서 ‘전통적인 양식’이라고 표현해서 왠지 모를 고루함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인 ‘포드 기원 632년’ 경, 즉 우리의 셈으로는 서기 2540년 정도 되는 세상에서의 ‘전통적인 양식’은 곧 지금 우리 현대인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생활양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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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속 세상은 지금 읽어도 참신하게 느껴질 정도이니, 작품이 쓰인 시기가 1930년대 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독자들에게는 여간 상상키 쉬운 이미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소설의 발단에서부터 이 멋진 신세계의 구조와 모습을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나간다. 나름 간략하게 정리해 본 ‘멋진 신세계’의 모습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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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헨리 포드가 도입한 컨베이어 벨트식 생산 방식은 효율성과 대량 생산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인류는 세계 대전과 경제적 혼란 등 혼돈과 불안정의 시기를 겪으며 극단적인 안정성과 효율성을 갈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갈망의 해답을 찾으며 ‘단순화’, ‘획일화’, ‘통제’, ‘관리’와 같은 키워드에 집착했다.
이때 유일하고 완전한 해결책으로 부상한 것이 바로 포드의 방식 즉, 포드주의(Fordism)다. 이러한 거센 변화의 흐름은 전통적인 국가와 정부를 휩쓸어가 버렸고, 전 세계가 단일한 ‘세계 국가(World State)’로 재편되어 포드주의를 사회 전반에 적용해 급기야는 인간까지도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 인공적으로 배양·육성하는 방식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보카노프스키’ 방식으로 인공 배양되는 이 신인류들은 전통적인 방식처럼 ‘출산’되지 않고, 정자와 난자의 수정 단계에서부터 완벽하게 목적성에 맞는 존재로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이라는 5단계의 등급으로 설계되어 ‘부화’한다.
유전자 단계에서부터 조작되고 관리되며, 철저한 ‘사전 조건화 교육’, 다시 말해 지속적인 세뇌를 거쳐서 ‘출고’되는 이들은 각각 알맞게 ‘수량’이 조절되고 필요한 지능과 기질, 체질등을 탑재한 후 사회 각 분야에 배치된다. 이들은 현대 우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 각자 계급에 따라 다른 질이 다른 처우와 질이 다른 강도의 노동을 하며 살아가게 되기 때문에 수많은 불만을 가지고 갈등을 야기할 것처럼 보이지만, 애초에 완벽하게 ‘조건화’되어 있는 이 ‘신인류’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역할에 대해 전혀 불만을 갖지 않고 오히려 주어진 처지에 행복감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족’, ‘임신’, ‘부모와 자녀’, ‘결혼’, ‘사랑’ 등과 같은 개념들을 외설적이고 미개한 것으로 정의하고, 유아기 때부터 이를 철저히 세뇌받았기에 그들은 인생에 얽매일 것을 만들지 않았으며, 언제든지 구속 없이 원하는 이성과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여가 시간이면 오직 신체적, 감각적 즐거움을 탐닉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으며, 여전히 인간들의 집단이기에 발생할 수 있는 일말의 감정적 문제나 정신적 고통들은 모든 것을 잊게 해 주고 안정과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소마’라는 알약을 통해 언제든 해소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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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의 주요 무대는 대략 이러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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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줄거리는 중심 인물중의 하나인 알파 계급의 버나드가 평소 관심을 갖던 여성 레니나와 함께 ‘야만인 구역’을 탐방하게 되면서부터 점차 시작된다. 그들은 그곳에서 과거 사고로 인해 야만인 구역에 임신한 채로 방치되어 (부끄럽게도) ‘존’이라는 아들을 출산하고 폐인이 되어 살고 있는 린다를 만나게 된다. 이때 버나드는 이전에 자신이 일하고 있던 ‘인공부화, 조건반사 연구소’의 소장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이 린다라는 여자가 과거에 소장과 함께 야만인구역을 탐방 왔다가 사고로 낙오된 그녀였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이 충격적인 사실을 적절히 활용하면 당시 소장과의 갈등으로 흔들리던 자신의 안위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린다와 그녀의 아들 존을 데리고 ‘신세계, 런던’으로 돌아온다.
린다의 아들 존은 신세계의 세뇌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 덕분에 야만인 구역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저급한 이방인의 취급을 받으며 자라왔다. 그렇기에 어머니에게서 말로만 듣던 전혀 다른 세상인 런던으로 가자고 하는 버나드의 제안은 꿈만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 ‘멋진 신세계’에 도착한 존은 또 한 번 ‘이방인’ 혹은 ‘야만인’의 취급을 받으며 그저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세상의 구경거리로 전락한다.
한편 존의 눈에 비친 신세계의 인류들은 짐승의 습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안정과 만족에 취해 살아가는 것으로 보였고, 그는 이런 세상을 몸소 경험하면서 환멸을느끼게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는 점점 절정을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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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소설 속에서 인류는 완벽에 가까운 효율을 갈망했고 급기야 이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모든 것은 기계화, 규격화되었고, 수백만 년 전부터 인간을 괴롭혀 오던 각종 신체적 정신적 고통들은 잊고 살아도 될 만큼 사소한 문제가 되었다. 사회는 완벽히 통제되어 마치 뛰어난 설계품처럼 돌아가서 지금 우리가 겪는 사회적 갈등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부족할 것이 없이 딱 들어맞는 완벽한 세상이다.
특히 작금의 답답한 현실을 생각한다면 이런 ‘신세계’는 마치 유토피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좋게’ 쓰인 설명을 읽으면서도 왠지 우리의 마음은 편치 않다.
마치 ‘메타버스’의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이것은 분명히 인간의 세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왜일까?
그 이유는 바로 ‘인생’이라는 것이 갖는 속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의 세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다양한 세상들이 모여 전체의 세상을 이룬다.
전체와 각각의 세상들은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충돌하고 융합하며 때로는 진화하고 때로는 퇴화해 가며 변화해 간다. 그리고 그 하나의 ‘전체 세상’은 다시 각각의 ‘인생’의 무대가 된다.
그렇기에 어떤 세상이라도 인위적으로 구성지어질 수 없다.
만약 어떤 세상이 인위적인 외력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어 조건화되고 구성지어졌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세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인생’의 주된 속성은 스스로 느끼고 사고하는 데에 있지, 주입받고 통제받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전인미답의 인생에서 시시각각 찾아오는 비효율과 불안은 성가시기 그지없다. 그리고 이 망할 놈의 기억이라는 장치는 온갖 원치 않는 기억들을 미친 듯이 인출해대어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환경적 요인 그리고 질병과 노화에 취약한 신체를 잘 관리하며 산다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장 성가신 것이라고 인위적으로 배제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온전한 인생'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마오쩌둥의 ‘제사해(除四害)’ 운동과 같은 결말이 따를 뿐이다.
지워져야만 살 수 있는 고통도 간혹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고통이란 우리를 성장시키고 강하게 만드는 촉매제이며, ‘인간다운 세상’을 구성하는 필수 조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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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생각해봤으면 하는 부분은 ‘결코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에 대한 것이다.
한 사람의 세상이 전체의 세상의 일부이며 전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생각은 자연스럽게 내가 바라보는 세상과 타인이 살아가고 느끼는 세상이 매우 다른 것 일 수도 있다는 인식에 이를 수 있다.
물론 수용가능한 정도의 각기 다른 생각들이 모여서 더 큰 군집의 공통 세상을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하게 모두가 같은 생각으로 일치단결하는 하나의 세상은 존재할 수 없다. 크게는 두 개로 많게는 수십억 개로 나누어질 수 있는 각자의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기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관심,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세상에 다가왔을 때 가져야 할 포용력이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 각기 다른 세상을 이루고 있는 그들에게서는 도무지 상대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나, 다름을 받아들이려는 포용의 자세를 찾아볼 수 없다. ‘신세계’의 그들은 강력한 ‘조건화’와 ‘세뇌’ 같은 것들을 통해 애초에 그 문을 걸어 잠가 버렸고, ‘야만인’으로 불리는 그들 또한 고루한 생각과 방식에 젖어 새로움과 다름을 저급한 것으로 치부하여 배척하며 살아간다.
눈여겨 볼만한 또 한 부분의 세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세계의 실수로 잉태되고 조건화나 세뇌가 없이 야만인으로 자라난 ‘존’이라는 세상이다. 그는 신세계와 야만 접경에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기에, 사실 나는 작품을 읽으며 그가 중간자로서 일으킬 변화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 이야기의 흐름은 그렇지 못했다. 소설 속 그 두 세상이 쌓아 올린 장벽이 워낙 이도 튼튼했기에 존이라는 이례적인 존재는 그저 배척대상이나 흥밋거리로 치부됐다.
개인적으로 더욱 안타까운 것은 양쪽 모두를 경험할 기회를 가졌던 존 조차도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인데, 그 또한 오로지 ‘일련’의 경험과 ‘일부’의 책만을 기반으로 쌓아올린 섣부른 신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고수하며 그와 다른 모두를 경멸하고 배척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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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스러운 매춘부 같으니!”
“일 그램의…… 소마 일 그램을 먹는 편이 좋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야만인이 어찌나 심하게 밀어내었던지 그녀는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나가!”
그녀를 위협적으로 내려다보면서 그가 외쳤다.
“내 눈앞에서 꺼져! 안 꺼지면 죽일 테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레니나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존 제발 그러지 말아요.”
-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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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저 자신의 세상에서 당연한 방식으로 그 이방인 존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존은 그녀를 문란한 매춘부로 몰아붙이고, 결국은 그 세상 모두를 저급한 존재들로 단정 짓기에 이른다. 그는 그렇게 다시 하나의 높고 튼튼한 장벽을 세운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고 그 장벽밖의 세상을 무시하고 배척하게 된 것이다.
일면 대한민국 정치 현실을 보는 듯하다. 이해와 포용 따위는 기대하기도 힘들며, 내가 무조건 맞고 혹여나 나의 잘못이 있다면 너의 더 큰 잘못 때문이라는 요즘 초등학생 수준에서도 못 미치는 논리만 펼쳐댄다. 서로서로 물고 뜯고, 객관적인 잘잘못에 대한 성찰은커녕 물타기에 급급하고, 각자 자기 할 말만 하고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자기의 신념을 의심해 볼 수 있는 지혜가 없는 인간들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권력을 차지하고, 그런 그를 비판하는 세력이 생기면 그저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제거하려 든다.
이미 한번 서로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세워놓고 그 결과를 경험했음에도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한 모양새다.
이렇게 다시 한번 보이지 않는 장벽들이 물리적 장벽이 되어가길 바라는 것인가? 장벽을 세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삼아서는 결국 계속해서 여기저기 또 다른 장세들을 세워가는 결과만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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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했다는 생각이 버나드의 뇌리를 스쳤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좋은 술이 늘 그렇듯) 그는 이제까지 불만스러웠던 세계와 완전히 타협하게 되었다.
세계가 그를 중요한 존재로 인정하는 한 세계의 질서는 훌륭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으로 인해 세계와 화해는 되었지만 버나드로서는 이 질서에 대해 비판을 가할 특권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서 비판하는 행위는 자신이 중요한 인물이라는 의식을 고조시켰고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감정을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신이 비판해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그의 순수한 신념이었다(동시에 성공으로 인해 그가 원하는 모든 여자를 손에 넣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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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생각해 볼 부분은 독서 또는 정보에 관한 것이다.
신세계에서는 ‘필요한’ 기술이나 정보전달 목적의 책만이 존재하고, 모든 정보들은 세계 정부에서 철저한 검열을 거친 뒤 배포된다. 야만인들의 세상에는 아직 과거로부터 전해져 오는 책들이 일부 존재하나 그들은 읽고 정보를 습득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 볼 의욕이 없다. 그저 전통에 따르고 공동체가 정해준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중간지대의 존’은 이 측면에서도 또 다른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그는 그의 어머니 린다를 통해 어렸을 때부터 신세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어왔고, 동시에 야만인들의 전통을 보고 겪으며 자라났다. 그리고 글을 어느 정도 읽을 줄 알았기에 야만인들의 세상에서 운 좋게 유실되지 않고 남아있던 몇 권의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읽을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그는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당대 현실에 없던 새로운 가치와 지혜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도 단지 여기에서 그칠 뿐이다. 존에게 허용된 유용한 책들이란 평생 읽어온 몇권의 책, 딱 거기까지 뿐이었기 때문에 존은 반복해서 그것들을 읽으며 오히려 그 책들이 펼쳐놓은 세상에 갇히기에 이른다. 그렇게 굳어버린 그의 신념은 결국 세상이 그 몇 권의 책들을 바라보듯 그 또한 그렇게 세상에 비치게 만들어 버린다. 포용이라는 커다란 가능성을 가졌지만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존재에 불과했던 존은 또 다른 한쪽의 이해하지 않고,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단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다'라는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 있다. 책을 다양하게 읽지 않으면 그릇된 신념에 빠지기 쉬움을 경계하는 말일 텐데, 성경만 평생을 연구해도 모자랄 판인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만 봐도 그 위험성이 생각보다 현실적이고 심각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소설 속 세상의 그들은 제한된 환경에 놓여있기 때문에, 다양하게 독서를 하고 정보를 취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긴 하다.
하지만, 인간의 신비로움 때문일진대, 작중에서도 스스로 깨어있는 생각들을 해내고 그런 연구들을 하는 인간들이 분명히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강력한 세계 정부는 그 모든 것을 통제하고 사회에 안정을 해칠 수 있는 생각을 하거나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들을 사전에 검열하여 배제시킨다. 이렇게 신세계 인간들은 완벽한 필터링을 거친 ‘필요한’ 정보만을 입력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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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불허!
서명을 하면서 가엾게 되었구나 하고 총통 무스타마 몬드는 생각했다.
그것은 걸작이다.
하지만 일단 목적론적 해석을 용인하기 시작하면 -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아는가! 그것은 상층계급 사이에서 확고한 사상을 지니지 못한 자들이 받은 조건반사 교육을 백지로 돌릴 가능성이 있는 사상이다.
지고의 선(善)으로서의 행복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상실케 하고 그 대신 인간의 최종 목적이 어느 피안에 있다고 믿게 할 위험이 있는 사상이다.
최종 목적이란 현재의 인간 영역 밖에 있으며 인생의 목적이란 행복의 유지가 아니라 의식의 강화와 세련이며 지식의 확대라는 믿음을 심어줄 위험이 있는 사상이다.
-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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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비록 우리는 다양한 양질의 정보를 다양한 매체나 도서를 통해 취득할 수 있지만, 사실 우리도 어떤 시각에서 본다면 여전히 소설 속 세계 정부가 하는 그것과 비슷한 통제 속에 놓여 있다고 해도 매우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현대사회로 발전해 오면서 언론 통제나 검열 등은 거의 사라지고 자유로운 정보의 바다가 형성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오히려 너무 과도하게 많은 정보들이 쏟아지는 탓에 올바른 정보를 가려내기가 더욱 힘들어지고 있고, 사용자의 편의를 극대화시킨 플랫폼과 그 속의 알고리즘은 우리 내면의 자극추구욕구나 확증편향을 그대로 반영하여 ‘원하는’ 정보를 눈앞에 쏟아낸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알아차리려는 인지적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그저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정보 속에 파묻혀 시야를 잃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호기심을 가지고 다양한 정보들에 마음에 문을 열고, 다름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스스로를 의심해 보며, 읽고 쓰고 생각하는 힘을 길러 ‘분별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우리는 현실 속에 존재할 수 있는 유무형의 통제와 검열들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게 세상을 이해하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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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굉장히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실제로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세계대전을 겪으며 대두된 이념 간의 갈등에 대한 투영이 보이기도 한다.
‘멋진 신세계’의 세계 정부는 마치 칼 마르크스가 꿈꾸던 이상적인 공산주의 국가를 재현해 놓은 것 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유전자를 조작하고 인간을 부화시키고 세뇌시키는 비인간적인 조건이 수반되어야만이 가능한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런 세상은 ‘디스토피아’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도 담고 있는 듯하다.
앞서 언급했던 마오쩌둥의 >제사해(除四害) 운동>을 비롯해 <소련의 아랄해 개발>, <19세기말 미국의 메뚜기 박멸 운동> 또는 <호주의 토끼 문제> 등과 같은 인간중심주의적 오류와 기술맹신주의적 오만이 불러온 재앙들의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올더스 헉슬리가 살아온 무대는 19세기 말~20세기 중순, 영국과 미국이다. 그래서 그는 급격한 산업화의 흐름이 만들어 내는 위협적 소용돌이에 잠재된 위험성을 시대적, 공간적으로 밀접하게 보고 겪으며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당장 피부에 와닿는 피해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묵과하기 마련이고, 문제를 부각하려는 열정을 가진 경우라도 대개 언론적 호도나 학술적 방식에 따르기 일쑤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적으로 잘 알다시피 이러한 방법들은 비교적 수명이 짧다.
더욱 지혜로운 사람들은 ‘문학’이나 ‘예술’을 통해 이런 문제의식을 남긴다. 당장 바로 생각해 봐도 최근에 노벨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경우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고, 많은 고전 반열에 올라있는 문학작품들이 이런 방식으로 시대적 문제의식이나 철학을 작품의 이야기 속에 녹여내어 왔다.
이 ‘멋진 신세계’도 그렇다. 그리고 심지어 이 작품은 먼 미래를 그려낸 모습이 상당히 창의적이라 지금도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읽어볼 수 있는 일종의 시대를 초월한 ‘신선함’까지 담아냈다. 때문에 최근 2020년에 미국에서 소설을 원작으로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였고, 여러 영화에서도 오마주 되기도 하고 있다.
이것은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그의 IP(Intellectual Property Rights)가 상업적 가치를 지녔다는 사실을 넘어 그가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의미 있는 메시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형성하게 하고, 이것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후대에도 계속 전해질 수 있다는 데에 방점이 찍힌다.
기술과 인간성의 문제에서부터 소통과 화합, 그리고 정보의 유통과 습득에 대한 고찰, 정치경제적인 부분까지도 생각해보게 하는, 100여 년 전에 쓰였음에도 지금의 현실까지 반영해 내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역시 명불허전의 ‘CLASSIC’,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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